서극의 칼 무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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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감상평 1
: 1946 - ) 서극의 칼 오우삼(吳宇森, John Woo
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히어로
우리는 '홍콩'이란 지명을 떠올릴 때 과연 무슨 생각부터 하게 될까? 중화요리, 중국, 아편전쟁 등등 많은 것들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생이 되어가던 시기의 홍콩이란 혹은 과 동의어였고, 이 시기의 시네마 키드들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나의 많은 친구들이 을 통해 그들이 서 있는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을 해석했고, 동네 싸구려 삼류 극장에서 은 컬트영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듣기에 따라 오우삼의 아우라(aura)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주윤발이 내뱉는 대사들은 겉멋에 찌든 신파조 대사들이었으나 그 시기의 우리들에게 그의 대사 하나하나는 죽음을 앞둔 무사의 허무하고 비장미 넘치는 한 마디였다.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고 총탄 무제한의 쌍권총을 난사하며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이 낯선 홍콩 배우 '소마' 주윤발에게 매료된 당시 젊은 관객들은 을 반복 숙독해야할 교본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들은 그를 따라 너나 할 것 없이 짙은 색의 롱코트를 걸쳤다. 하긴 우리들에게 80년대 이후의 아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신파조 대사들에 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중학 시절부터 눈뜨면 반복되는 최루탄 냄새 속에 등교하였고, 혹 하교 후 사복 차림으로 동네 한 바퀴 산보라도 하려면 몇 차례씩 반복되는 전경들의 불심검문에 멈춰서야 했으며 점거농성이란 말이 피부에 와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바로 눈앞에서 친구와 선배들이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도 의 그 어두움은 우리 사회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우삼은 하워드 혹스(Howard Hawks: 대표작 1932년 작으로 고다르는 데뷔작 를 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들었고, 브라이언 드 팔머는 83년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대표작 및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유명한 감독), 샘 페킨파(Sam Peckinpah: 대표작 폭력미학의 대부)로 이어지는 액션 장르 영화의 작가주의 계보를 잇는 감독이다. 서극의 칼 그런 우리들에게 의 세계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변혁이자 체질적으로 양지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도 조금만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지금
쿠엔틴 타란티노는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그린다면 오우삼은 액션을 연출한다' 고 말했으며, 그에게서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내 개인적인 평가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에게서 코스츔만을 배워왔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오우삼이 짊어진 동양적 정서는 배제한 채 일종의 율동만을 배워온 셈이다.)
오우삼의 생애를 통해 본 홍콩 느와르의 여명
오우삼은 1946년 중국 광둥성의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이 부유한 집안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의 일가족은 공산화된 중국을 떠나 1951년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월남민인 셈이다. 본토를 떠나 당시로서는 사회주의 중국의 한 귀퉁이에 자본주의의 섬으로 남게 된 홍콩에서의 오우삼 가족은 너무나 가난해서 낡은 오두막집을 전전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1953년 대화재로 오두막마저 불타버려 그후 몇 년간을 거리에서 집 없는 노숙자로 살아야만 했다.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10년 동안 투병 중이었고 오우삼의 어머니가 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우삼은 어린 시절을 폭력과 마약, 매춘이 만연된 빈민가에서 보내게 된다. 오우삼은 자라면서 깡패들의 패싸움이나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대결을 가까이에서 접했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지옥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죠.” 독실한 루터 교도였던 그의 가족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교회는 나의 은둔지였고 부모님은 나의 수호신이셨습니다.”
그의 가족은 교회를 통해 어느 미국 가정의 도움을 받게 되어 소년 오우삼은 이 가정의 도움으로 8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오우삼은 한때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으나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 예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이점은 마틴 스콜시지 감독과도 흡사하다.) 그는 미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루터교 학교에 다녔는데, 이 때문에 그는 제임스 딘(James Dean),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등의 미국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당연히 그것들에 매료된다. 오우삼이 홍콩에서 제작한 느와르풍의 영화들에서 성당 장면이 나오는 까닭도 그가 어린 시절 교육받았던 미션 스쿨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오우삼의 어머니는 대단한 영화광이어서 아들인 오우삼을 데리고 거의 매일 영화를 보러다녔다. 그녀는 특히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과 캐리 그랜트(Cary Grant)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오우삼 역시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영화들은 진 켈리(Gene Kelly)나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가 나오는 같은 뮤지컬 영화나 프랑스 영화들이었는데(이런 점들은 그의 후배 감독 왕가위의 삶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수 있다. “어린 시절, 미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곳을 상상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곳이었는데, 바로 뮤지컬에서 그런 곳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선량한 곳이었습니다.” 서극의 칼 왕가위는 "홍콩에 이주한 아버지는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일하셨다. 이 나이트클럽은 에 나오는 중경빌딩 지하에 있었다. 어머니는 영화광이어서 어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두세 편씩 영화를 보았다 .아버지는 또 문학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기 때문에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면서 "젊었을 때는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뒷골목의 술집들을 많이 다녔다"고 설명했다.) 그가 특히 뮤지컬 영화들에 심취하게 된 데에는 이 영화들이 비참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인데 대공황 시기 미국에서 많이 제작된 영화가 뮤지컬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공감할
에 삽입된 는 그가 본 첫번째 본 뮤지컬 영화 의 주제곡이었다. 그가 이런 뮤지컬의 세계를 꿈꾼 것은 동시에 그의 삶이 신산했다는 것과 그가 다분히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영화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데 그것은 홍콩을 떠나는 부류와 홍콩에 그대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우삼은 당연히 홍콩을 떠나고자 했다. 공산주의를 피해 홍콩으로 온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고, 그가 받았던 미션스쿨 계열의 학업들이 그의 이런 판단을 더욱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들은 그의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를테면 그에게 있어 홍콩은 중국의 것도, 영국의 것도 아닌 홍콩 사람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파크의 홍콩 야경을 바라보며 영화에서 아성 일당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주윤발이 송자호에게 치료받으며 '아름답군... 이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읊조리는 부분은 홍콩 반환을 앞둔 오우삼의 대사였을 것이다.
오우삼은 16세 무렵의 청소년기에 학교 공부보다는 영화와 예술에 빠져 도서관, 박물관, 영화관을 전전했다. 고등학생 때에는 연극을 연출해보고 직접 연기도 하는 등 점점 더 영화에 몰입했지만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란 가공의 것이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철학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을 꺾지 못하자 그는 이런 말을 오우삼에게 남겼다고 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하지만, 정도(正道)를 걷고 기품 있게 살아야한다."
오우삼의 영화 입문과 작품세계의 바탕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우려 했던 1960년대 홍콩에는 영화학교가 없었다. 게다가 부친의 죽은 뒤로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해야했다. 그는 라는 신문사에 취직하여 시, 미술, 철학 등 몇 가지 분과로 나뉘어진 모임을 갖게 되고 그는 이 모임에서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분석하면서 지식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오우삼과 그의 친구들은 유럽영화, 일본의 예술영화, 실험영화들을 좋아했지만 1970년대부터 유럽영화는 몰락해갔고, 대신에 미국영화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오우삼은 그의 평생 스승이라 할 수도 있는 샘 페킨파, 프란시스 코폴라,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과 같은 감독들의 영화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서극의 칼 오우삼이
특히 스탠리 큐브릭은 오우삼과 그의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독이었는데, 오우삼은 그 중에서도 와 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이라고 말한다. 오우삼 작품 세계에서 풍기는 동양적 비장미는 그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을 좋아했고 당시의 유행철학이던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탓이 크다. 또한 그의 청년기를 사로잡았던 당대의 현실이 그것인데,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의 홍콩은 다른 어떤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격동의 시기였다. 공산당원과 국민당원의 충돌로 촉발된 두 번의 대규모 시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갱들의 세력다툼도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다.
오우삼은 당시를 회상하며 "히피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제가 살고 있는 사회와 전쟁에 관해 항상 고민했고 반전시위에도 참여해봤으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런 지적인 풍토에서 성장한 오우삼과 그의 그룹은 당시의 홍콩영화계(이 무렵의 홍콩영화들은 당시 우리의 영화보다 수준이 낮았다.)를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여러 잡지에 기고하며 홍콩 영화계에 여러 적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그의 글들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앙드레 바쟁이나 트뢰포 등이 비교적 쉽게 영화계에 입문한 프랑스적 풍토와 비교해보면 더욱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항상 자신들이 홍콩영화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친구들 중에서 지금까지 영화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오우삼을 비롯해 몇 명되지 않는다. 오우삼이 홍콩영화를 송두리째 바꾼 것은 어쨌든 맞는 장담이었다.
오우삼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히어로들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오우삼은 영화클럽의 회원으로서 몇편의 단편영화들을 찍지만 급료는 형편없었고 단지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 대본검토인(script-supervisor) 자격으로 캐세이 스튜디오(Cathay Studio)에 처음으로 취직하게 된다. 1971년 그는 캐세이 스튜디오를 떠나 홍콩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던 쇼브라더스 영화사(Shaw Brothers Film Company)로 이적하는데 오우삼은 그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던 장철(張徹, Chang Cheh)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水滸傳, 1971), (馬永貞, 1972), (四騎士, 1972), (刺馬, 1973) 등의 영화에 참여한다.
홍콩영화는 주연 여배우들만이 인기있었을 뿐, 남자배우들은 조연에 불과했다) 서극의 칼 샘 페킨파가 같은 이들이 상상 속의 스승이라면 오우삼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 장철은 그의 현실의 스승이었다. 장철 감독은 뛰어난 무협영화들을 만들어 홍콩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1960년대 초 홍콩에는 여성들간의 유대감을 다룬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장철은 그와는 반대로 남성들간의 신뢰와 우정을 다룬 영화를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이전의
그가 만든 액션영화들은 홍콩영화인들로부터 샘 페킨파의 작품들처럼 리얼리티가 뛰어나면서도 홍콩 액션영화의 테크닉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적룡(狄龍), 왕우(王羽), 이수현(李修賢) 등은 모두 장철의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이다. 오우삼은 1년 반 정도 장철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촬영, 편집, 사운드 더빙 등 많은 것을 직접 해볼 수 있었고, 특히 편집작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는 지금도 젊은 후배들에게 감독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편집을 배울 것을 권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삼이 장철에게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서양인 감독에게서 배울 수 없는 동양인만의 정서를 작품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었다. 장철의 무협영화 전편에 흐르는 우정과 의리, 명예에 대한 것은 그대로 살리며 오우삼은 칼 대신에 총을 들게 한다. 그가 자신의 갱스터 영화들을 "총을 든 무협영화"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다만 오우삼의 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서구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런 골빈 액션 히어로들이 아니라 풍부한 감정과 의협심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이전의 중국영화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오우삼은 "영화 속에 우리 자신을 좀더 많이 대입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성룡에게 최초의 주연직을 맡긴 감독이 바로 오우삼이었다.)오우삼의 작품 스타일은 무제한의 쌍권총 난사만이 아니다. 지금은 개나 소나 다 사용하는 슬로우 모션이지만 오우삼이 처음 등장하던 당시의 슬로우 모션 장면은 정말 잘 짜여진 한 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오우삼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오우삼의 영화에는 클리셰(Cliche: 영화 속에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라 불리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슬로 모션이나 고속촬영, 쌍권총을 난사하는 주인공, 그림자로 상대방의 위치를 알게 되는 상황설정,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두 남자, 총을 공중으로 던져주는 장면, 플래시백으로 과거의 액션을 보여주는 장면, 경극과 버금가는 동작 그리고 장중한 음악 등을 꼽을 수 있다. '액션 미학'이라고까지 불리는 화려한 액션 신과 그 밑바탕에 깔린 허무주의가 어우러진 오우삼의 영화에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있다. 1973년, 오우삼은 영화산업에 투자하고 싶어 하던 친구를 위해 을 제작하게 된다. 오우삼의 작품 스타일의 맹아는 사실상 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내용은 청일전쟁 당시 무기밀매를 하던 갱들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찍는다. 서극의 칼 오우삼은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약간 센티멘탈한 쿵푸영화를 계획했어요. 저예산영화였고 그럭저럭 괜찮은 배우들이긴 했지만 사실 캐스팅도 별로였죠.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그 영화 괜찮다고 말해줬는데, 불행하게도 홍콩에서는 상영이 금지됐습니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이유였어요. 사장이었던 내 친구는 완전히 돈을 날릴 뻔 했죠.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영화를 골든하베스트에 팔았는데 뜻밖에도 영화사측에서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어요. 그래서 저랑 계약이 된 겁니다." 그는 겨우 27세의 나이로 홍콩에서 가장 젊은 영화감독이 되었다. 당시 홍콩의 감독들은 대부분 적어도 45세 이상이었고, 그들도 최소 15년간은 조감독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겨우 1년 반 동안만 조감독 생활을 했던 오우삼을 못미더워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골든하베스트에 소속되어 1977년까지 쿵푸영화를 주로
1977년 오우삼은 허관영(許冠英)와 함께 그의 첫 코미디물 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는다. 이 영화 이후로 오우삼은 주로 코미디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그의 이런 외도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고 시들해지며 오우삼 역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신화가 되다. - 길을 잘못 들어선 지난 세기의 영웅들
하지만, 1986년 서극(徐克)이 제작을 맡고 그가 감독한 이 모든 것을 바꿔놓게 된다. 예전에 오우삼은 젊은 영화인들을 도와주곤 했는데, 서극 역시 그때 오우삼에게 도움을 받은 후배였다. 몇 편의 실험성 짙은 영화로 주목받던 서극이 골든하베스트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오우삼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류제작자 겸 감독으로 유명해진 서극이 같은 방법으로 오우삼을 도와준다. 서극의 도움으로 다시 골든하베스트와 계약할 수 있게 된 오우삼은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프로젝트 의 제작을 서극에게 맡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홍콩느와르", 서양에서는 "Heroic Bloodshed"라고 알려진 독특한 홍콩 갱스터영화들의 효시가 된 은 전통적인 무협물의 스토리에 누벨바그(nouvelle vague)적 요소(서로 대립되는 캐릭터의 설정은 그 한 예입니다)와 샘 페킨파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현란한 폭력 등을 결합해 만든 영화였다. 은 1986년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주윤발(周潤發), 장국영(張國榮), 적룡(狄龍) 등 출연배우들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오우삼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자칫 평범한 무협, 코미디 영화감독으로 사라질 뻔한 그를 자신의 세계관이 있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평가받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7년, 의 촬영 도중, 오우삼과 서극의 관계가 벌어져 서극은 더이상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에 오우삼을 쓰지 않기로 하고, 오우삼이 제출한 , 프로젝트를 연거푸 반려하고, 베트남을 무대로 하겠다는 오우삼의 컨셉트을 이용해 서극 스스로 의 감독을 맡는다. 결국 오우삼은 자신이 계획했던 의 컨셉트를 수정·보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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