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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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감상평 1
해적왕ㅇ 장보고인가..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암튼 과학에서 숙ㅈ ㅐ 내 주셧능데
그걸 만화 ? 암튼 보고.. 줄거리 써오라구 해능데..
못 봐서.. 줄거리.. 잘좀.. 그냥..
감상평 2
당에서의 활동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8세기 후반 경에 완도(莞島), 혹은 그 인근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후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자기보다 10세 가량 어린 동향(同鄕) 후배 정년(鄭年)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니, 805년이라는 해는 재당 시절 장보고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의 유년시절에
즉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05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겠고,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라에 귀국한 시점이 828년이었으므로, 그의 재당(在唐) 기간은 9세기초 20여년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당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데 선봉에 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은 819년에 완전 토멸되었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소장직에까지 승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로치청 번진세력이 반당의 기치를 내걸고 대두하게 된 것은 765년에 고구려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가 당 조정으로부터 임명받은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가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819년 완전 진압될 때까지 이정기(765~781년)-이납(李納;781~792년)-이사고(李師古;792~806년)-이사도(李師道;806~819년)로 이어지는 3대 55년 동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소왕국’을 이루어 군림하였다. 한 때 이정기일가의 번진세력은 산동반도 일원의 15개 주(州)를 영유하고 10만의 대군을 거느리는 최대의 번진으로 성장하여 당 왕조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에 당 왕조를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당 왕조로부터 발해와 신라와의 해상교역을 관장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藩使)’의 업무를 위임받아 막대한 재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해운의 요충지에 집단 거주하면서 막강한 경제력을 발휘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후원도 이정기 일가의 권력기반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이사도의 평로군도 대당제국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 결국 분열과 붕괴의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이사도 세력의 진압전에 참전했던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의 저력을 발견하고 이를 확신하게 되면서, 이정기 일가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 대안으로 그들의 경제적 권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갔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갔으며, 이것이 장보고가 당대 최고의 국제 해상무역가로 입신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결국 무령군 소장의 경험에서 나온 군사전략가적 그의 소양은 해적퇴치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게 하였을 것이고, 여기에 두목(杜牧)이 칭찬했듯이 인의지심(仁義之心)과 명견(明見)의 통찰력을 겸비한 빼어난 그의 자질은 재당신라인사회에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통해서 그는 재당신라인사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해
동북아시아 해상권의 장악
장보고 무역선단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은 크게 세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와 경항(京杭)대운하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해 있던 고구려·백제 유망민과 신라인들이며, 다른 한 집단은 한반도 서남지역의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주민들, 마지막은 백제의 유이민과 자연재해로 인해 이주한 신라인들에 의해 형성된 재일신라인사회이다.
신라인취락은 산동반도 남안일대에서 해주(海州), 그리고 대운하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 연안에 산재해 있던 촌락을 연결해 보면 신라와 당의 중심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된다. 그리고 운하의 심장부는 초주(楚州)였음을 알 수 있다.
초주에서 35Km 떨어진 연수현(漣水縣)은 옛 회하하류의 북안에 위치한 내륙수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도 신라인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엔닌(圓仁)에 의하면 이곳에 총관과 ‘전지관(專知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주 신라방의 크기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운하연변에 거주하던 다른 신라인들처럼 대부분은 운수업·무역·?조선업·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있다. 그리고 일부 목탄생산에 관계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은 촌락주변이 산림지대였고 또한 주민들이 목탄업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음으로 산동연해안지역을 살펴보겠다. 엔닌 일행은 해주 동해현 숙성촌(東海縣 宿城村)연안에서 하선하였다. 이곳에서 엔닌일행은 밀주(密州)로부터 초주로 목탄을 수송해 가던 우호적인 신라상인들을 만나 이들의 안내로 인근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으로 안내되었다. 숙성촌은 바다에 면한 마을로 이곳 신라인들은 주로 소금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엔닌도 마을주변에 ‘취염처(取鹽處)’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신라인 촌락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에서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평현(牟平縣) 소촌포(邵村浦)와 도촌(陶村), 해양현(海陽縣) 동북의 유산포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은 해운업·상업보다 농업에 종사한 듯하다.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文登縣 淸寧鄕 赤山村)은 산동반도일대 신라인들의 중심지였을 뿐아니라 당내륙·연해안 교통과 신라와 당 및 일본 3국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장보고가 건립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어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법화원은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庄田)을 소유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영 등 3인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난 강회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강연의 마지막 2일간은 250명과 200명이 각각 참여하였다. 법화원은 이외에도 고국에서 온 여행자라든가 무역관계종사자들을 위한 숙박소로도 제공되었던 듯하다.
한편 8세기 중엽을 고비로 하여 신라와 일본간의 국교는 사실상 단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공무역의 길이 막히게 되자 양국간에는 사무역에 대한 욕구가 크게 증대했다. 당시 일본측은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었는데 이는 주로 신라상인들의 중개무역에 의해서 충족되고 있었다. 신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나·당·일 삼국간의 무역에 유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에 있어서 당시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신라인사회의 존재가 주목된다. 신라인은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일본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신라인이 끊임없이 일본의 각 지역 즉 하모야국(下毛野國)·무장국(武藏國)·미농국(美濃國)·근강국(近江國)·준하국(駿河國) 등에 이주하여 신라인사회를 형성하여 신라인의 성(姓)을 갖고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인사회의 명칭은 신라군(新羅郡) 또는 도전군(度田郡) 등으로 불려졌다. 이러한 신라인사회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신라의 승려나 관리들이었다.
신라 역어(譯語, 신라출신 통역관)와 재당신라인들이 긴밀히 협조하여 중국과 외교절충을 하거나 일본사절이 귀국하기 위하여 초주에서 배 9척과 선원 60명을 마련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재일신라인사회와 신라본국간의 연락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견당일본사절사선(遣唐日本使節使船)에 동승한
재일신라인들도 재당신라인들처럼 주로 무역에 관련된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일신라인들은 일본정부가 필요로 하는 각종 고급인력을 제공해 주었다. 엔닌의 일기에 나타난 역자·선원·승려·노젓는 사람 등은 재일신라인들이었다. 이외에도 귀국할 일본조공사선(日本朝貢使船)의 준비·항해의 지휘·재일신라인사회 주위에 있는 일본인에 대한 기술지도 등을 수행하였다.
청해진이 설치된 후 장보고의 대일무역활동은 본격화되었다. 그가 당시 일본에 보낸 무역사절단은 회역사(廻易使)라 했는데, 이들의 무역활동은 다자이후(大宰府)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의 묵인 아래서 이루어졌다. 한편 장보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신라와 일본간의 분쟁을 통해서도 대일무역의 번성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장보고는 재일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및 재당신라인사회를 연결하는 일련의 무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항로를 장악하여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만화말하려면.. KBS에서 들어가보시면 나옵니다.더 많이 알고싶으면 네이버에
검색창에 해상왕장보고 치면 됩니다.도움되시기..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감상평 3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역사적 평가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 부하였으나 장보고를 시기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신분상의 지위향상을 노리고 있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장보고의 약력
장보고의 출생연도와 장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한국사에서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할 뿐만아니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출생연도
신라 애장왕(AD 800∼809) 시기로 추정
▣ 출생지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완도의 해안지방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 그의 이름
궁복·궁파 - 한국측 기록, 활을 잘 쏜다는 뜻
장보고(張保皐) - 중국측 기록, 궁복과 궁파의 중국식 발음에서 온 것으로 추정
장보고(張寶高) - 일본측 기록,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그의 의형제
완도에서 같이 자라고 무예를 익힌 고향 아우, 정년
▣ 어린시절의 장보고
장보고는 뛰어난 무예와 함께 사람들을 지휘하는 통솔력을 지님
장보고의 입신 과정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① 당나라 무령군 장교로서 반당 세력 토벌
②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
③ 왕위 계승문제에 개입하여 진해장군과 감의군사가 됨
▣ 장보고와 이정기의 관계는?
이정기는 반당 번진의 장군임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는 당나라 무령군의 장교이고
▣ 이정기 토벌 후에는?
신라에 귀국한다.
▣ 당시 신라의 해적 피해는?
해적들은 신라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함
▣ 해적의 준동을 본 장보고의 반응은?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의 관직을 버리고 신라로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 건의
▣ 청해진 설치 후에는?
'청해진대사' 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에 종사
▣ 장보고의 관직은?
① 중국의 관직 : 무령군중소장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② 흥덕왕 시기 : 청해진대사
③ 신무왕 시기 : 감의군사
④ 문성왕 시기 : 진해장군
▣ 그의 중요한 업적은?
질적 변화를 이끔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① 민간무역 질서를 태동시켜 9C 동아시아 사회의
②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발전시킴
③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확대
▣ 장보고의 개인적 능력은?
그는 의롭고 포용력이 강하며 뛰어난 통솔력과 용병술의 소유자로 무역, 외교에 능숙
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장보고 세력이 확대되고 그의 딸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되면서 신라 귀족들이 정치적 위협을 느꼈고, 장보고에게 흡수된 군소 무역업자들의 반발등으로 살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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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등장의 배경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당나라의 경제체제와 조공무역 8세기 공무역체제(公貿易體制)의 성립과 운영 9세기 공무역의 쇠퇴와 사무역의 발달 중앙정치의 혼란과 유이민의 만연
-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8~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에도 매우 흥미롭고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의 토호들이 각지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나가던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화해 가던 시기였다.
7세기 초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唐)은 율령을 정비하고 제도화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은, 이러한 정비된 통치체제를 바탕으로하여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세계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해 나갔으며,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제국으로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 율령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그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모순은 안사(安史)의 난(亂; 755~763)으로 폭발하였다. 이 난의 결과 당에서는 율령에 의한 기존의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사회는 각 지방의 절도사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성립되었다. 이들 번진세력들은 8~9세기 당의 정국을 주도하며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는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반당적(反唐的) 번진으로 바뀌어 당왕조와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는 당 왕조와 번진세력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생활고를 가져왔고, 결국 9세기말에 이르면 황소(黃巢)의 난(亂; 875~884)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주도해나가던 당은 결국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신라는,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율령제를 수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이후 100여년간 신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8세기말에 이르러 왕권은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해 갔다. 그리고는 이들 진골귀족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중앙정부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에서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에서도 지방분권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889년(진성여왕 3년) 전국에서 농민반란을 야기하였고, 지방호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신라는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7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중심으로 종래의 씨족제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의 율령제와 신라의 문물까지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 율령제는 갖가지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고, 9세기에 와서는 정치권의 붕괴양상까지 뚜렷해졌다. 국가권력의 상징인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였으며 이를 대신하여 귀족세력인 후지하라씨(藤原氏)에 의해 ‘섭정정치(攝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귀족세력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지방에서는 토호들이 세력을 신장하여 각지에서 할거하더니 결국에는 쇼해이(承平)·덴기요(天慶)의 난(935~941)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이후의 역사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승평?천경의 난을 통하여 각지의 토호들은 이른바 ‘무사(武士)’로 성장하면서 이후 일본에서 전개되는 봉건적 정치질서를 주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청해진의 설치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신라 하대(下代 : 780~935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당(唐) 나라에 유학을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출세를 위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골품제(骨品制)라는 엄격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제한된 관직과 정치적 출세에 제약을 받던 6두품(頭品) 이하의 신분층을 정치권에서 축출·도태시키기 위한 신라 정부의 방침도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라 사회 내부의 왕권(王權)을 둘러싼 쟁탈전이나, 경제 질서의 문란 등 정치·사회적 혼란도 당 나라로의 유학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張保皐)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보고가 당 나라 서주(徐州)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이 30세 남짓이라 파악되기 때문이다. 본래 해도(海島) 출신이라 알려진 장보고는 신라 신분제 사회에서 그다지 높은 계층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곧바로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자기 지방에서의 실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특정한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 역사에서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세력은 특히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많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아마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 태생으로서 뛰어난 무예를 갖고 있었던 해상세력 출신의 장보고는,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과 출세를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간 것이라 보인다.
당시 당 나라도 신분제 사회였기는 하지만, 신라처럼 지배층 사이에서의 차별은 없었다. 또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많은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당 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하도록 한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는 당 나라로 건너가, 30세 남짓에 무령군(武寧軍) 소장이 될 정도의 출세를 하고,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 무장(武將)으로 출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820년대 전반기에 장보고는 당 나라에 기반을 두고 신라·일본 등 동아시아 일원의 해상 교역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 : 794~864년)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에 장보고가 대사(大使)라는 직위를 갖고 824년(헌덕왕 16년)에 일본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이러한 장보고의 활동은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이 있는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법화원은 일찍이 장보고가 세운 사찰로서, 군대에서 물러나 해상 교역을 시작한 장보고로서는 본래의 연고지인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가문의 세력 근거지였다. 이정기 가문은 이 지역에서 3대에 걸쳐 신라·발해와의 교역을 통제하여 왔었다. 특히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의 교역에 중점을 두어, 중요한 군수품인 말(馬)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라는 산동반도 지역을 통한 당 나라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아마 고구려 출신인 이정기가 신라보다는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19년에 이사도(李師道)가 당 나라 중앙 정부에 의해 토벌됨으로써, 산동 지역에서 이정기 가문의 영향력은 소멸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도 장보고 세력의 등장에 좋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가 등장하기 이전의 산동반도 일대는 고구려 출신인 이정기(李正己)
이처럼 산동반도는 당시에 중국 대륙과 한반도 및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중요 교통로였다. 또 이들 지역의 나라들은 사신의 왕래를 비롯하여, 일찍부터 민간인들의 왕래가 있었다. 특히 신라 사람들은 산동반도 일대에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자신들의 사회를 이룩하고 있었다. 신라방은 신라인들이 중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후,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던 사회이다. 산동 지역 신라방은 문등현(文登縣)에 있는 구당신라소(句當新羅所)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경험과 전통 등이 장보고로 하여금 산동반도 일대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정기 가문이 몰락할 즈음 산동반도를 둘러싼 황해 일대의 해상 교역은 중국 동해안이나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근거를 둔 해적들의 출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즉 강력한 통제 세력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여러 해적 집단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해적들은 교역선(交易船)에 대한 재물 약탈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이 때 특히 많은 피해를 보게 된 것이 신라였다. 신라는 본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황해 일대에서 해상 교통·교류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사신이나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고자 할 때에도 신라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해적들의 약탈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완도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바다에 익숙하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당 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장보고로서는 자연스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장보고는 해적들의 약탈 행위로 인한 피해나, 그러한 피해를 예방하여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장보고가 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청해진 설치의 배경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해적들의 소탕과 안정적인 항해·교역 등의 확보는 장보고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옛 기록에는 당 나라에서 활동하던 장보고가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등의 행위를 막기 위해, 828년(흥덕왕 3년)에 귀국하여 국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 흥덕왕(興德王 : 826~836년)은 장보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대사(大使)의 직함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주면서 청해진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짧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을 장보고 자신의 활동이나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수 있다. 위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당 나라는 세계적인 제국(帝國)으로서, 선진 문물의 산실(産室)임과 동시에 서양 세계와의 교섭 창구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당 나라와의 교역이나 중국 대륙 지역으로의 진출에 적극성을 띠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첫째는 신라방·신라소 등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던 신라 세력과, 그에 기반을 둔 장보고의 해상 활동 경험을 들
장보고의 중국 대륙 진출도 결국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신라인들의 적극성과 진취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장보고 개인은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갔고, 또 평소의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군대에서의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은 장보고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신라인들이 이루어 놓았던 산동반도 일대에서의 기반을 근거로 적극적 해상 교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장보고 개인의 역량도 중요한 것이지만, 장보고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청해진의 설치는
ⅰ)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ⅱ) 그 시대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필요한 대외 교류와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파악한 장보고의 역사 인식 및 개인적 능력,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ⅲ) 그리고
둘째는 신라 사회 및 중앙 정부의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란을 겪었던 혜공왕(惠恭王 : 765~780년) 이후 진골(眞骨) 귀족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심화되어 왔다. 따라서 신라 국왕의 위상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특히 헌덕왕(憲德王 : 809~826년)은 자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 : 800~809년)을 죽이고 왕위에 즉위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까지 경험하게 됨으로써 신라 왕권을 둘러싼 귀족 세력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에 따라 국왕의 통치 행위나 중앙 정부의 행정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기 위한 투쟁에 많은 것을 허비해야만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민생을 위한 정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헌덕왕 때의 신라 사회는 많은 자연 재해에 시달려야 했다. 화재·홍수 등은 물론이고, 고대 사회에서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던 천체(天體)의 이상 현상도 자주 일어났다. 또 직접적으로 심한 가뭄과 흉년의 피해를 수시로 입어,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어가거나 굶주려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천재지변과 자연 재해로 인하여 815년(헌덕왕 7년)에는 고통에 못이긴 백성들이 무리를 이루어 도적질에 가담하기도 하고, 816년(헌덕왕 8년)에는 170~180명의 신라 사람들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 지역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신라 백성들이 절강성 지역에까지 양식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이전 시기부터 황해를 둘러싼 중국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해상 왕래가 상당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피해를 주는 자연 재해는 장보고가 등장하는 흥덕왕 시기에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정권 쟁탈전에 치중하느라 자연 재해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던 신라 중앙 정부로서는 청해진을 설치하겠다는 장보고의 제안을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장보고의 활동을 이미 알고 있었을 신라 중앙 정부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적들을 소탕하여 교역이나 백성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정권이나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장보고의 활동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민심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덕왕은 선뜻 1만 명의 군사까지 내어주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를 지원했던 것이라 판단된다.
세째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과 관련하여 장보고 개인의 의지와 애국심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완도 출신인 장보고는 평소 바다에도 익숙했지만, 중국에 건너간 후 기마(騎馬)와 창술(槍術)에도 능하여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보고는 이처럼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 상당한 출세를 한 인물이었다. 또 해상 무역에 관심을 갖고, 군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산동반도를 근거로 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 따라서 신라 출신으로서 당 나라에서 명예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있으니,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당 나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따라서 장보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지러운 모국(母國) 신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 나라에서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는 국왕에게 청해진의 설치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그는 당 나라 여러 곳에서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이것은 장보고가 해적들 때문에 당 나라에 끌려온 동포들이 노비 신세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고, 그것을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당 나라에서 무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전개한 경험이 있는 장보고로서는 동포들의 그와 같은 고생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장보고로서는 여건만 주어진다면 해적들의 약탈 행위를 방지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 나라에서의 장보고는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상인의 위치에 있었을 뿐, 정치적·군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지위에 있지는 못하였다.
아마 이런 의지와 동포애가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신라 국가의 차원에서 해적들의 약탈 행위를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장보고는 자신의 능력을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국가적·민족적 차원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하고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국가의 인정을 받는 군진(軍鎭)을 설치하여 자신이 관할함으로써, 해상 교역의 안정을 도모하여 신라에 대한 해적들의 경제적·인적(人的) 약탈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몇 가지 점이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 또는 원인이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가 갖는 신라사에서의 의미와, 우리 역사에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장보고 세력의 성격 -
신라방 사람들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의 서남해안에 위치한 청해진을 근거로 성장한 세력이고, 마지막으로는 재일신라인사회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 세력은 우선 지역별로 보면 크게 세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는 당의 산동반도의 적산촌 일원과 운하변을 중심으로 해운력에 바탕을 둔 신라인 촌락과
이 지역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로 보아 장보고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적당한 지역이었다. 특히 재당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두 곳은 그 나라의 변방에 위치하여 중앙정부로부터의 지배나 간섭이 소원하였고, 특히 산동반도는 오랫동안 번진의 발호가 극심한 곳이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이며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삼국간의 무역을 통하여 크게 성장한 장보고세력이 가장 좋아할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산동반도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번진이 55년 간이나 군림했던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
골품체제에 의하여 억눌려 있던 신라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모여들 수 있었던 최상의 지역이기도 했다. 청해진 세력의 6효장 가운데 5명은 적어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였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두 곳의 신라인 집단은 단결력이 강한 이주민이었으므로 타국에서의 동족의식이라든가 나라에서는 동향이라는 점에서 유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쉽게 결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와 같은 이 지역들의 특성과 그곳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그의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장보고 세력의 기반은 다른 사병소유자가 형성한 세력과는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결코 청해진 설치 당시까지는 중앙귀족이나 지방세력은 아니었다.
그 세력의 축의 하나는 신라 본국의 재지세력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탈해 간 세력으로 당 나라에서 해운력을 바탕으로 한 외래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조정으로부터 소외된 서남해안의 해도인들, 곧 노예상인으로부터 약매되어 간 사람들이 그 한 축을 차지한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는 이러한 이탈세력과 소외된 자들을 규합하고 결속시켜 그의 세력으로 형성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세력은 다른 어떤 지배세력과도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세력집단을 관장하기 위해서는 신라군제와는 다른 조직체계와 독립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약매를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장보고 세력이 아무리 이질적이고 독립적이라 해도 결코 신라 중앙정부로 부터의 완전 이탈은 아니었다. ‘청해진대사’로 임명된 사실은 곧 신라에의 신속을 의미한 것이다. 마치 당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행정적·군사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던 당 나라 후기의 일부 번진과 같은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뒷날에 ‘감의군사 실봉 2천호’로 봉해진 사실에서도 세력의 독자성은 명백해 진다. 이 때의 분봉은 곧 정치적 혹은 군사적인 독자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의군사’ 라고 하면 바로 당 나라 군제의 ‘절도사’나 ‘감군사’ 등을 연상케 하는 직함이다. 또 뒤에 그에게 주어진 ‘진해장군’이라는 호칭도 매우 중국적이며, 특히 ‘장군’이란 호칭은 뒤에 가서 독립된 호족이나 성주가 자칭하던 명호이기도 했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 세력의 바탕은 ‘군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 세력은 군사적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해진에는 신라의 어떠한 군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반면에 당 나라 번진의 병제 일부가 원용된 듯한 칭호가 보인다.
것으로 생각된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곧 ‘대사’와 ‘병마사’가 그것이다. ‘대사’는 이미 논급한 바이지만, ‘병마사’의 경우 청해진에서는 국제무역과 관계된 직책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역에 종사한 사람들이 회역사(廻易使)·매물사(賣物使)의 직함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선단을 총괄한 인물이 ‘병마사’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의 무역선단도 기본적으로는 군사적 조직으로 편제·운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청해진에는 중국 번진의 아군(牙軍)과 같은 친위 상비군도 있었을
한편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설과 군사적인 성격을 강조한 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장보고는 상인, 군인, 정치가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왕조들이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서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해상에서는 많은 해적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역경영자는 독자적인 무장을 통해 무역의 조건을 스스로 마련하여야만 하였고, 또한 잉여생산물이나 수공업생산자의 대부분이 지배권력층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경제구조상 무역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치권력에 접근하거나 정치세력화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상인인가 아니면 군인, 또는 정치가인가를 둘러싼 논란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장보고 군진의 군사조직과 직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역은 병마사를 우두머리로 그 에하에 회역사·매물사가 전담하였을 것이고, 군진은 6효장을 중심으로 군조직이 편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군대를 가리켜 ‘군용이 심히 융성하였다’고 한 표현은 그것이 매우 조직적이고 능동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장보고는 완도에 설진하면서 그 인근의 넓은 지역까지도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곳 농업생산에는 의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생산력으로는 수많은 사병을 양성·유지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경제적 기반은 아무래도 국제무역에서 얻은 동산(動産)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해운기술자를 통괄하며, 선박을 소유하고, 원근해의 교역과 운송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경제력은 무역에서 얻은 동산(動産)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삼국간을 종횡무진으로 교역한 물량과 얻은 재부(財富)를 생각만 해도 쉽게 긍정이 갈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보고 예하에 있으면서 무역에 직접 종사하거나 관련된 신라촌·신라방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해외에다 무역사무소(중국 산동반도의 적산촌과 일본 하카다)를 두고, 압아·총관·촌장을 비롯한 관리와 뛰어난 선원과 우수한 선박을 보유하고, 유능한 통역관을 갖춘 이들 집단이,
한편 서구 중세봉건사회를 근대사회로 발전시켜 나간 사회계층 가운데의 하나가 원거리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던 상업자본가세력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국제무역에서 얻은 부의 막대함을 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장보고세력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당의 번진체제에서 그 골격을 따온 군사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보고선단의 대중국·일본에서의 활약상을 통해 볼 때, 경제적 성격 즉 무역을 통한 이윤확보라는 면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 해적의 소탕과 해상교역 장악 -
장보고 제독의 중요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해상에서나 연해에서 신라인들의 선박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또 신라인들을 납치하여 당나라에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들을 황해를 포함한 동북아 전해역에서 말끔히 소탕하여 바다의 평화를 되찾아 놓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해상에서 납치되어 팔려가는 신라인이 더 이상 없게 된 것이다.
바다의 주인들이었다고 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통일 신라 말기에 내분으로 국정이 문란하여, 나라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소탕하지 못한 해적으로부터의 민생보호를 실현함으로써, 장보고 제독은 신라인의 긍지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의 근간이 되는 해상교통의 안전을 확보케 되었다. 이 점에 관하여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는 엔닌의 시대에 동북아 지역에서는 신라사람들이 아직도
그때 신라는 제해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가 보다. 소위 씨 레인(Sea Lane)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것으로써 장보고 대사는 당시 동북아 국제해상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보고 대사가 직접 국제교역의 주역으로 나서서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라든가 회역사(廻易使)를 당나라나 일본에 파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보고 대사가 동북아 해상교통의 요충인 완도에다 진을 치고, 황해와 남지나해 및 대한해협을 지나 일본에 이르는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신라의 국제해상 통상진흥을 통하여 나라의 부강에 기여하였음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후대에 두고두고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서나, 장차 중국 및 일본과의 3각 무역을 통한 원대한 통상발전 전망에 비추어 보거나, 또는 머지않아 도래할 소위 서해안시대에 비추어 볼 때에, 완도는 중요한 해상 요충지로서 국제해상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기하기 위한 자주적 국토개발 정책의 견지에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마헨(Capt. Alfred Mahen)이 강조하는 바 씨 파워의 기지로서도 더욱 개발되어야 할 곳이라 하겠다. 청해에 진을 치고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해적의 소탕에만 멈추지 않고, 장보고 제독은 더 나아가 당나라와의 해상교역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과도 새로 교역을 터서 활발한 해상무역을 발전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자기실력으로 해상왕이 되었다. 라이샤워교수가 그의 역서 「엔닌의 기록」에서 장보고 제독을 ‘한국 무역의 왕자(Korean merchant prince)’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들이라고 라이샤워 교수가 한 것은 비단 동북아의 해상교통관계의 중심이 청해진에 있었고, 국제무역의 주도권을 장보고 제독이 관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신라인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항해술도 의당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일반 신라인들의 해운역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 견당사의 중국왕래가 신라통역의 안내와 주선에 의하여 행하게 되었으며, 그들 사행의 선박도 신라선을 많이 충용할 뿐 아니라, 일본 선박에도 신라인 선원들을 고용하였고, 특히 당에 파견하는 사절단에는 다수의 신라선과 해로에 능통한 항법사 60여명을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입당 유학승 엔닌과 그 제자들의 중국왕래 및 그들의 통신이 신라 상선에 의하여 행해지게 된 것은 차라리 보통의 일에 속했다 할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시 국제 해상교통의 중심지가 청해진 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상기 박사는 전기 논문에서
당시 신라인의 그같은 해상세력은 전술한 장보고의 활동과 상응할 것으로 믿나니, 이제 그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유명한 일본의 입당 구법승 엔닌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방도에 관하여 장보고의 부하에게 보낸 서신에서 청해진을 경유할 요량으로 장대사에게 그의 사정을 전달하여 달라는 것과 또 선편이 있으면, 자기 일행을 찾아 귀국하게 하여 줄 것을 간청하고 있음을 볼 때, 장보고가 당시 내외국인 사이에 해상 패자로서 공인받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엔닌이 당나라에서 일본으로의 귀국선편을 장보고에 간청하는 내용 뿐이지만, 사실은 서기 838년에 엔닌이 당나라로 가는 일본국 사절단 일행을 태운 12척으로 구성된 선단에 편승하여, 처음으로 당나라 산동반도에 도착했을 때에도 동 선단을 일본으로부터 안전하게 당나라 땅까지 갈 수 있도록 배의 길잡이 즉 지금같으면 항법사 30명을 장보고 제독으로부터 지원받아서, 각 선박마다 신라인 항법사 2-3명을 태워, 그들의 지도에 따라 안전항해를 했다는 것을 엔닌은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9세기에 동북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장보고 제독을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무역의 왕자, 또는 바다의 지배자로 표현하고,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이었음을 분명히 그의 저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라사람들을 바다의 주인이 되게끔 하였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 항해술이었던 것 같다.이 항해술에 관한 한,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이나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신라인들이 우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동북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우수하였던 것 같다.
그 사례를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의 「엔닌의 당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현대를 당나라 때 세계 무역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데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을 지 모른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럽에 있어서 경제적 성장 및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는 15-16세기 서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재빨리 이룩된 세계의 바다에 대한 제패와, 수세기 동안 이 바다 위에 존재하였던 해상무역에 의하여 촉진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서양의 시작을 그 시기로부터 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널리 세계사적 견지에서는
엔닌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도입한 첫단계의 중요 시기 중 마지막으로 간 중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국 대륙에서 만났던 신라 사람들은 이 세계 역사상 하나의 새롭고 보다 더 극적인 단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지중해 및 기타 비교적 작은 호수를 지배하긴 했으나, 끝없는 대양에 감히 도전하는 것은 오직 천천히 이루어졌을 뿐인 것이다. 일부 한정된 교역이 아시아 대륙의 남해안에서 어느 기간동안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인류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경제를 통하여 마침내 우리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까지도 변경시키기 시작할 정도의 해상무역이 성장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엔닌이 서기 845년 산동에서 돌아오기 전에, 비록 장보고와 그의 해운왕국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 3명의 일본 여행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귀국 교통편을 거의 전적으로 신라 사람들한테 의존하였다. 그들 일본인들은 적산(赤山)에 있는 마음씨 너그러운 신라 거류민들에게 숙식을 의존하였을 뿐 아니라, 귀국선편까지 기대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항해술 발달에 대한 장보고의 업적은 3국간 국제해상교역 및 동 선박(견당매물선 및 일본에 보내는 회역선 등)관리에 청해진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능히 짐작하고 남는다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장보고 제독이 신라시대의 항해술 발전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9세기 중반 신라의 항해술은 당시 세계 제일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른다는 개연성도 라이샤워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 제독이 더 오래 살아서 해상교역 뿐 아니라 국가 민족을 위하여 더 기여하지 못하고 신라 문성왕(文聖王) 8년에 뚜렷한 죄없이 암살 당한 후, 그의 부하들마저 반역으로 몰려서 대부분 당나라로 도망가고, 일부는 일본으로 도망쳤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나라의 해운 능력이란 원래 장보고 제독 산하의 해외 망명 신라인들에 의하여 유지되었거나, 계승 발전된 것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도 세계사적 견지에서 볼때 9세기 경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3국간 국제해상교역이 이 시대의 첨단을 걸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까지도 동북아 바다의 주인공들은 아직 신라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이나 아랍사람들이 최초로 사용했다는 항해용 나침반도 당나라 민간인들 사이에 일부 전승된 것으로부터 발전시킨 것인지도
여기에서 잠시 신라 선원들과 일본 선원들의 항해능력에 대한 라이샤워 교수의 비교 논평 내용을 살펴보자.
엔닌의 일기(入唐求法 巡札行記)」나 기타 다른 자료에서 보면, 일본 사람들이 극동의 해상교역에 있어서 신라 사람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 일본인들의 도전은 아직 미약했다. 엔닌이 당나라까지 바다를 건너 갔다가, 일본 배를 타고 산동반도 남해안까지 파행적인 항해를 한 기록을 보건데 귀국시 그를 태운 신라 선박들이 일본까지 8일만에 도착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또 한가지 항해 기술상 당시 신라인들과 일본인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일본 사절단 간부진들을 안전하게 일본까지 도착시키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 사절단이 60명의 신라인 타수(舵手)와 선원들을 고용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일본 사절단이 당나라로 떠날 때 각 선박에 승선했던 신라인 통역들의 역할이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 감안해야 할 요점이 된다. 이들 신라인 통역들은 당나라 해안에 도착한 뒤의 업무처리에 매우 유용했을 뿐 아니라, 엔닌이 자기 자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던 것을 언급한데서 볼 때, 분명히 이들 신라 통역인들은 해상에서는 최고의 항법 전문가들이었다. 극동에서 신라사람들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을 시대도 실제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얼마후에 일어난 장보고 제독의 암살로 말미암아), 그러나 엔닌 시대에는 아직도 신라 사람들이 동북아의 해역에서는 바다의 지배자들이었다.”
장보고와 해상왕국의 몰락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신무왕의 즉위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은 역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염장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보고에 대하여, 일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장보고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 또한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살해당한 것이 확실하다. 문성왕에게는 본래 박씨 성의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어보내려다 좌절되어 살해되었지만, 위흔(魏昕)이라는 이름도 사용한 김양은 장보고가 죽은 뒤인 842년(문성왕 4년) 3월에 자기의 딸을 국왕의 둘째 왕비로 결혼시켰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에 살해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에 당 나라와 장보고의 왕래가 841년 이후에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속일본후기』의 장보고 사망 연대 및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보고는 841년에 염장에게
이 과정에서 아마 김양과 장보고의 알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출신 성분은 미미하지만, 국왕으로부터 진골(眞骨) 귀족급에 해당하는 상당한 예우를 받는 장보고가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딸마저 왕비로 만들려 하자, 중앙 정치 무대에 강력하게 대두하는 장보고의 영향력을 우려한 김양이 염장을 이용하여 장보고를 제거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견해로는 청해진 설치 이후 해상 무역권을 박탈당했던 서남해안 일대의 여러 작은 세력들이, 장보고 딸과 문성왕의 혼인 문제가 발생하자 중앙 세력과 결합하여 장보고를 제거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이 본래 청해진 지역을 관할하는 무주 출신이었으며, 신무왕 즉위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무주를 다스리는 두 번째 서열인 주조(州助)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즉 염장 자신도 해상세력 출신이었으나, 장보고의 등장으로 위축되었던 인물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여하튼 딸과 국왕의 혼사 문제로 인하여 장보고가 피살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장보고의 사망과 함께 청해진 해상왕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청해진은 염장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속일본후기』에 염장이 자신의 부하인 이소정(李少貞)을 일본에 보내어, 장보고 당시 일본으로 가져간 무역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창진 같은 사람이 염장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장보고 사망 이후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예를 들어, 한 때 대당매물사로 활동했던 최훈(崔暈)은 당 나라 연수(漣水)의 신라방으로 망명하였다. 또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해진 해상왕국은 일시 염장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장보고가 이루어 놓았던 군사적 기반이나 해상 교역망(交易網)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염장 정도의 인물로는 장보고의 뒤를 이어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해 온 청해진을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염장은 장보고와 같은 거대한 해상왕국을 이루고 유지하기보다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을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확보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국익과는 관계없이 또 하나의 반정부(反政府) 지방 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중앙 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 2월에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것은 장보고가 염장에게 살해된 지 9년 남짓만의 일이었다. 중앙 정부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의 주민 집단을 단체로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특정 지역의 백성들을 단체로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사민(徙民)이라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의 사민은 몇 가지 이유에서 행하여졌다.
설치하는 경우, 경주 사람들을 그곳으로 옮겨 중앙 고급 문화가 지방으로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사민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새로이 영토를 개척하여 통치 영역을 확장하였을 경우, 새로운 땅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토록 함으로써 행정적으로 완전히 영역화 하기 위한 사민이 있다. 셋째는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 그곳 사람들을 단체로 생소한 다른 곳으로 옮겨 원래의 거주지에서 갖고 있었던 토착적인 기반을 빼앗아버리기 위한 사민이 있다. 따라서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백성들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으로 옮긴 것은 세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첫째는 중요 지역에 소경을
그러나 어떠한 토착적 세력 기반을 박탈하기 위해 신라 중앙 정부가 청해진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겼는가 하는 이유에 대하여는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청해진이 장보고의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에, 청해진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긴 것은 장보고의 잔여 세력들을 토착 지역에서 분리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청해진을 없애고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긴 것은 장보고가 사망한 지 9년이 지나서이다.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왕국 세력들을 자신들의 근거지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면, 장보고 사망 직후 사민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해진의 해체와 백성들에 대한 사민은 장보고가 사망한 9년 후에 있었다. 또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이창진처럼 염장을 없애고 청해진 해상왕국을 부활시키려 하다가 죽임을 당했거나, 당 나라나 일본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아마 장보고 사망 이후에도 청해진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청해진 해상왕국의 중요 인물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타 내륙 지방의 경우와는 달리, 청해진 해상왕국의 사람들은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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